행복했던 한 때
란초/곽승란
남매는 철없이 좋아라하는데
불 보듯 뻔 한 삶을 선택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걱정에 걱정을 하면서도
일은 해야 하고 아이들도 달래야 하고
도저히 감당이 안 돼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을 엄마,
그렇게 해답을 찾지도 못한 채
남매 눈치만 보시는 모양이었다.
그분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하교 시간이면
찾아오시곤 하는데 그때 당시 일하시는 곳이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중 고등학교 근처였다.
우리는 다시 학교 가까운 대방동으로
집을 옮겼고 엄마가 직장을 다녀도
넉넉지 못한 살림은 변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도시락 대용으로 옥수수 카스테라가
나오면 선생님께선 집에 가서 먹으라고
대 여섯 개쯤 봉투에 담아주시곤 하셨는데
부잣집 아이들은 그 빵이 먹고 싶어
도시락하고 바꾸어 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매는 참 착했던 것 같다.
말썽 피워 본 적도, 사고 친 적도 없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공부하고 놀다
엄마가 오시면 진수성찬도 아니고
쌀밥이 아니어도 엄마와 함께
먹는 밥은 맛있었다.
지금도 그 때를 그려보며 웃어본다.
아주 또렷하게 나지 않는 기억도 있지만
지금 말하는 내용보다
더 심한 고생도 했었던것같다.
이 세상에 오로지 엄마와 나와 동생,
그렇다고 이웃하고 말하고 지낼 시간도 없는
우리 집 생활은 세 식구 외 누구도 없었다.
남들이 친척 집에 오고가면 그게 부러웠고
특히 아버지 있는 집이 제일 부러웠다.
그래서 남매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 했으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조르기를 시작했다.
"엄마~ 우리 아버지해요,네,엄마,엄마"
그래도 끔쩍 안하시는 엄마에게
남매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매일 조르기를 반복했다.
외롭던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은
참으로 행복한 단어였다.
"아버지" 얼마나 정겨운가!
남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기에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조금 큰 다음에 알았지만
그분은 인자하고 학문도 깊이가 있으셨다.
재산이 없는 것 빼곤 다 갖추신 분이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게 엮어지나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엄마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셨다.
냉정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남매에게 아버지가 생겼다.
마냥 신나고 좋아서 앉으나 서나
잠잘 때 빼곤 그저 아버지,
아버지가 입에 오르내렸다.
친아버지는 기억에 없다
지금도 나에겐 아버지는 한분이시다!
한동안 남매는 행복했다.
저녁이면 도란도란 네 식구가
앉아서 이야기 주고받으며
우리는 한껏 재롱을 피웠다.
그때 동생이 제일 잘 부르던
내수건 코 묻었네. 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몇 절 까지 계속 불러서
가족이 배를 잡고 웃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아 만나면
"넌 어릴 때 진짜 노래 못 불렀는데
지금은 어떻게 잘 부르지?" 하고 놀리기도 한다.
그렇게 행복한 날들 속에 아버지는
남매에게 참으로 헌신적이셨다.
친 아버지도 그렇게 하지 못 하리라.
퇴근하면 엄마 오기 전에 씻기고
함께 놀아 주시고 밥도 먹여 주시고
남매는 둘이 아닌 셋이 되어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남매에게 동생이 생긴단다.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엄마, 우리 동생 언제와?"
"응,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행복을 가져다주는데
또 다른 슬픔이 다가올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정말 팔자인 건지 아님 신이 시샘을 하는 건지?
( 일곱 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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