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그 해 봄
란초/곽승란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왔다.
쌓이고 쌓였던 눈이
봄과 함께 서서히 녹기 시작하면서
흘러내리는 물이 집 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흙벽돌로 되어 있는 방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벽이 젖어가자
이러다가 집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엄마는 방 안쪽 가장자리에
고랑을 파기 시작했고
그 고랑을 타고 물이 흐르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싶어
속으로 많은 울음을 삼키셨을 엄마.
그런 엄마의 심정을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봄은 천천히 다가오고
남매는 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이 되어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엄마도 열심히 도우며
착한 자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점점 배가 불러
걷기도 힘들어 보였지만
내색도 없으시고 그저 자식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이신가 보다.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엄마 때문에 너희를 고생만 시키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
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고
남매는 또 엄마 따라 울며
“엄마 왜 그래요, 우린 괜찮아요,
함께 이렇게 사는 것 만해도 좋은데요,
조금 있으면 동생도 하나 생기고 히히
우린 너무 좋아요 엄마, “
위로라고 하는 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 할까?
그저 엄마는 남매에게 죄스러울 뿐이다.
지금 내가 자식을 낳고 키우고,
결혼을 시켜보니
그때 당시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아마 죽고 싶은 심정이셨을 것이다.
가끔씩 봄바람이 불어 올 무렵 어느 날,
학교 끝나고 부지런히 집에 오니
아기가 이불에 쌓여져 있었다.
대단하신 엄마.
물이 흐르는 추운 방에서
아이를 혼자 낳으셨다.
자식에게 한없이 죄인처럼 미안해하시더니
드디어 동생을 주셨다.
누나는 부지런히 쌀을 씻어 밥도 짓고
미역이 없어 미역국은 못 끓여드리지만
대신 무국을 끓이고
시래기 김치 씻어 잘게 썰어 담아
밥상을 차려 드렸다.
그 밥상에 엄마는 또 우신다.
그런 딸아이가 너무도 대견스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에 목이 메이시는가보다!
누나는 어려서부터 고사리 손으로 밥을 할 정도로
철이 일찍 들어서 어른스런 면이 있다.
애기를 낳으면 어떻게 하는지
이웃 아주머니들한테 여쭈어보고
기억해 두고 있다가
이렇게 따뜻한 밥을 지어 드리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면서
다 떨어져 가는 쌀을 보며
마음에 조바심이 났었는데
학교 갔다가 와보니 아버지께 편지가 와 있었다.
내일 학교 끝나고 노량진 본동 근처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아버진들 마음이 편하셨을까?
자식 낳을 때가 다 되었을 텐데 하고
걱정하고 계셨을 것이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버지 계신 곳으로 달려갔더니
벌써 와 계셨다.
딸을 보자마자 얼싸안고 우시는 아버지
“우리 딸한테 너무 미안하구나,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만 시키고 있으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딸아, 우리 조금만 고생하자, “
하시며 봉투를 하나를 주셨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엄마 드려라,
아버지는 이제 막 낳은
자신의 핏줄이 보고 싶을 텐데
꾹 참으시며
“딸아. 아버지가 하던 일 빨리 끝내고 갈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줘, “
“네. 걱정 마세요, 아버지,”
부녀는 그렇게 헤어졌다.
누나는 자신이 낳은 딸이 아닌데도
친딸처럼 생각해 주시는
그런 아버지가 무지 좋았다.
그래서 기른 정이 더 깊다고 하나보다.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깊어가고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는 따스한 봄날
언니가 된 누나는 마냥 좋다.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물지게로 물 길어와
밥해서 엄마 차려드리고
아기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를 빨아 널면서도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열심히 한다.
정말 장하고 착한 누나 때문에
여동생은 무럭무럭 잘 큰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여름이 오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오셨다.
엄마는 설움이 북받치는지
아버지를 보고 가라고 한다.
가장 노릇,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뭐하려고 왔냐며 우시니까
“미안합니다, 못 난 남편 만나
당신과 애들이 고생하니 정말 미안해요,
앞으론 잘 하도록 노력할게요. “
어쩌랴!
그래도 핏줄이 있고 함께 동행해야할 한 가족인데.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전처럼 제대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물이 흐르는 집을 손보시고
다가오는 여름을 대비해서 지붕도 고치시고
이제 사람 사는 집 같은데,
마음 여린 심성 때문에
남을 도와주는 일 만큼은 어쩌지 못하시니
가족에겐 빵점인 남편이자 아버지다.
시간이 흘러 그해 여름.
장마로 인해 너무도 많은 비가 내렸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일도 못하고 계셨는데,
우연히 엄마에게 일감이 생겼다.
엄마는 성품 못지않게 인상도 인자하게 보여서
이웃 사람들이 다 좋아 했다.
그런 이웃중에 전남 목포에서 올라와 건축 일을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 청년들은 식사를 해 먹을 때도 있었고
사먹을 데도 있었지만
귀찮아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그 청년들이 엄마를 알게 되어
자기네 식사를 책임 져 달라고 부탁해서
엄마는 기꺼이 승낙을 했고
한 식구처럼 대하니 너무 좋아 했다.
그렇게 엄마는 밥 해주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남매는 오빠와 형이 생겨 좋았다.
그해 여름은 그 청년들 때문에
밥도 굶지 않고 그럭저럭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 엄마는 이제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가 서서히 다가오니
걱정이 많아지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도 일손을 놓아야 하고
우리 집에서 밥을 먹던 청년들도 추워서
일을 못하니 집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딸아이 중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 열 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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